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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부릅니다. 1516년 출간된 토머스 모어의 저서 ‘국가 중 가장 좋은 국가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하여’에서 처음으로 오늘날의 이상사회의 개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토피아에 대한 고전적, 현대적인 접근을 살펴보고, 현대적 접근에서 빠질 수 없는 ‘자유’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유토피아(Utopia)’는 ‘좋은 곳’과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입니다. 유토피아 이전에 제안된 이상사회와는 달리 인간의 힘, 즉 인간의 이성에 의해 각종 사회 제도를 개선하여 건설되는 사회라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풍요로운 자연환경, 전지전능한 신의 힘을 빌리지 않기 때문에 출발부터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유토피아의 특성을 처절하게 서술한 작품이 최인훈의 “광장”입니다.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유토피아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고전적인 접근 (최인훈의 <광장>에서) : "유토피아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보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광장”은 한국전쟁 전후를 살았던 ‘이명준’이라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해방 직후 남한사회는 속임수과 교활이 넘치는, 부도덕한 자유가 허락되는 사회라고 생각하고 월북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북한사회 역시 개인의 선택이 무시되고 집단의 이념만이 중시되는 왜곡된 사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딸을 잃고 포로가 된 그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 3의 중립국 인도행을 선택합니다. 인도를 향하는 배에서 그는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를 보며, 이념의 허무함을 깨닫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이러한 결말은 유토피아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랑, 생명과 같은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를 추구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현대에 들어서 ‘유토피아’에 대한 논쟁은 ‘인간공학’과 ‘사회공학’이라는 조금은 다른 측면으로 이어집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공학,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는 사회 공학과 관련된 논의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개인의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합니다.


유토피아의 현대적인 접근(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공학의 제시, 1984년 :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공학의 제시


먼저 ‘멋진 신세계’에서는 안정적인 유토피아 사회 건설을 위해서 인간 스스로를 ‘선별’하고 ‘사육’되는 신세계가 등장합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는 태아 상태에서 미리 계급과 직업, 능력이 결정되어 태어나며, 이후 주어진 삶의 방식에 만족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반복 학습됩니다. 하지만 구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존은, 신세계 지도자를 찾아가 설사 불행해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서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원한다고 외치며 마무리됩니다. 저자 헉슬리는 인간에게는 행복과 안정 뿐 아니라 자유도 필요하다는 것을 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합니다. 이는 유전공학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대에서, 과연 ‘인간 우생학’이 도덕적으로 옳은가에 대해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도덕적인 근거 등을 들어 강하게 반발하지만.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로 진화하며 현대에 오기까지 ‘사회에 맞는 인간’의 육성이 이루어져 왔고, 따라서 보다 효과적인 ‘사회공학’을 위해서 ‘인간공학’이 필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사회 공학’에 대해 서술한 ‘1984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를 완벽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빅브라더’가 존재하는 사회가 그려집니다. 주인공 윈스턴은 뉴스를 조작하는 일을 담당하는 중간 관리입니다. 그는 자신의 왜곡 행위에 대한 불만으로 저항을 시작하지만 곧 고발되어 사상경찰에게 넘어갑니다. 수많은 고문 끝에 결국 빅브라더에게 완전히 복종하며,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사회에 알맞은 인간’이 되어 고문실을 나가게 됩니다. 조지 오웰은 작품을 통해 유토피아는 억압적인 끼워 맞추기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 기반으로 사회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위해서 개인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결정할 ‘자유’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해서 서술한 앞선 두 작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봉착합니다. 


1) 과연 자유는 보편적인 가치인가? 

자유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라면, 행복과 안정이 보장되는 유토피아더라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위의 두 문학 작품에서 서술한 사회가 그러합니다. 하지만 자유를 단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하위 가치로 본다면, 자유는 완전한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즉, 현대 사회에서 대다수의 구성원이 행복하기 위해 자유로운 상태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마치 동등한 가치인 것으로 취급하지만, 만일 자유 없이 행복할 수 있다면 자유는 구태여 성취할 이유가 없다는 관점입니다. 

2) 완벽한 자유는 존재 가능한가?

이와 관련해서 마이클 샌델은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완벽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위의 존재 가능성의 여부는 어떤 사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보다 쉬운 논의를 위해 현대 자유주의 사회를 가정하겠습니다. 자유 시장에서 개인의 ‘선택’은 넓은 의미의 ‘교환’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시로 만일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하루 휴가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면, 하루의 임금과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욕구 충족을 교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사회에서 ‘완벽한 자유의 존재 가능성’은 ‘완벽한 자발적 교환의 존재 가능성’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현대에서 관찰되는 많은 교환은 완벽히 자발적이지 못합니다. 예컨대 한 학생이 집안 사정이 어려워 사립대학교가 아닌 국립 대학교의 진학을 결정했다면, 이는 분명히 자발적인 선택이었지만, 완전한 부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한, 완벽히 자발적이지 않았다고 해석됩니다. 사립대학교에 진학하고자 했던 의사가 존중되지 못하였으므로, 완벽한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 정치적, 사회적인 현안들에 대해 활발히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극단으로 갈라지고 의미 없는 논쟁이 본질을 흐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의 논의는 앞으로 보다 많은 사회 구성원이 만족하는 사회의 건설을 위해 충분히 논쟁할 가치가 있는 주제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신 독자 분들은 틈틈히 글에서 소개된 책을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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